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직장 추억1] 주판 소리와 업무 협조전 그리고 35년의 혁신
    추억 기록 2026. 2. 27. 13:57

    벌써 35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80년대, 처음 입사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나중에는 연구소로 이동을 했지만, 제 첫 직장 생활의 시작은 연구소가 아닌 생산관리과였습니다.

    그 시절 생산관리과에는 무려 10여 명의 여직원이 있었습니다. 모두 상고를 졸업하고 갓 사회에 나온 재기발랄한 인재들이었죠. 지금처럼 엑셀이나 전산 시스템이 없던 시절, 그들의 손끝에서 우리 회사의 숫자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여관방에서 치러낸 사업계획의 전쟁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사업계획을 수립할 때입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회의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회의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근처 여관을 하나 통째로 빌려 전 직원이 합숙하듯 일을 했습니다.

    밤낮없이 숫자를 맞추고 계획을 짜던 그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계산이 맞지 않을 때면 상고 출신 여직원들의 진가가 발휘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요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암산으로 숫자를 검토했죠. 그 정확함과 속도는 지금의 컴퓨터 못지않게 대단한 능력이었습니다.

    286XT와 Lotus 1-2-3, 마법처럼 사라진 주판 소리

    하지만 이 평화롭고(?) 시끌벅적했던 풍경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바로 컴퓨터라는 괴물의 등장이었습니다.

    286XT라 불리던 그 기계.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두 장을 넣으면 '북북'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그 컴퓨터가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안에 깔린 프로그램은 지금의 엑셀 전신이라 할 수 있는 'Lotus 1-2-3'였습니다.

    이 컴퓨터가 보급되자마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10여 명이 주판을 두드리며 며칠 밤을 새워야 맞출 수 있었던 숫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은 한두 명의 작업으로 순식간에 해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많던 상고 출신 여직원들이 마법처럼 사무실에서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기술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죠.

    아날로그가 준 낭만과 인연

    업무 방식도 참 정겨웠습니다. 다른 부서에 요청할 일이 있으면 '업무 협조전'을 작성했는데, 이 종이 뭉치를 부서마다 배달해 주는 전용 우체부 직원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메일 전송 버튼 하나면 끝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렸지만, 그 종이 한 장 한 장에는 사람의 온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일하면서도 우리는 참 많이 웃었습니다. 젊은 남녀 직원들이 다 같이 여행도 다니고, 정을 쌓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내 커플도 많이 탄생했지요. 돌이켜보면 그 불편했던 아날로그의 시간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더 끈끈하게 이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혁신이란 무엇인가

    그로부터 35년,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변했습니다. 주판은 컴퓨터와 AI로 대체되었고, 협조전을 배달하던 우체부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가끔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외치는 혁신은 무엇일까요? 과거의 혁신이 주판보다 빠른 계산과 효율적인 종이 배달이었다면, 지금의 혁신은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요? 기술은 변해도 그 기술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80년대 생산관리과의 주판 소리와 286 컴퓨터의 구동음이 여전히 제 귓가에 정겹게 남아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