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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땀으로 빚은 시간, 그리고 자연이 주는 단맛 - 포천 산사원에서
    건강하게 삽시다. 2026. 1. 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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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겨울 햇살이 머무는 곳

    차가운 겨울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휴일 오후,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산사원(전통술박물관)'을 찾았다. 단순히 술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복잡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묵묵히 익어가는 것들의 곁에서 숨을 고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뜻밖에도 한 사람의 치열했던 생애와 마주하게 되었다.

    2. 세월랑(歲月廊), 기다림의 도열

    산사원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것은 거대한 옹기들의 숲, '세월랑'이었다. 사람 키만 한 수백 개의 독들이 끝도 없이 늘어선 풍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바람(風)을 맞고, 햇볕(火)을 쬐며, 땅(地)의 기운을 머금은 채 침묵하고 있는 독들. 저 항아리들은 조급해하지 않고 오직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자신만의 향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장엄한 침묵 속에 서 있으니, 빠르게만 달려온 나의 시간들도 잠시 멈추어 서는 듯했다.

    3. 평생을 바친 몰입, 그 땀방울의 무게

    박물관 내부로 발걸음을 옮겨, 평생을 전통술 연구에 바친 우곡 배상면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전시관 벽면을 가득 채운 것은 빛바랜 연구 노트와 빼곡한 메모, 그리고 손때 묻은 실험 기구들이었다.

     

    "평생 하나의 일."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의 격랑 속에서도 우리 누룩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묵묵히 걸어온 그의 길.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갈아 넣은 고독한 몰입이자 정직한 땀의 증거였다. 요행을 바라지 않고 오직 노력으로 빚어낸 술이기에 그 향기가 이토록 깊은 것이리라.

    4. 나를 돌아보는 시간

    수십 년간 제조업 현장에서 품질과 씨름하며 땀 흘려온 나의 지난 시간들도 떠올랐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 그 길고도 외로운 싸움을 알기에 선생의 흔적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은퇴를 바라보는 시점, 나는 내 삶을 얼마나 뜨겁게 달구어 왔는가. 나의 인생 2막은 어떤 향기로 익어가야 할 것인가.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5. 떫은 시간을 견뎌낸 달콤함, 홍시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홍시'로 빚은 술이 눈에 들어왔다. 홍시만큼 우리 인생을 닮은 열매가 또 있을까. 처음에는 떫고 딱딱한 땡감이었을 테다. 하지만 찬바람과 무서리를 견디며 붉게 익어가는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부드럽고 달콤한 홍시가 된다.

    평생을 술 빚는 일에 바친 우곡 선생의 삶도, 치열하게 젊음을 보낸 나의 지난날도 어쩌면 저 홍시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겉멋은 빠지고 속은 달콤하게 꽉 찬, 그런 홍시 같은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6. 에필로그: 억지스러움을 뺀, 진짜 단맛

    집으로 돌아와 기념으로 사 온 '느린마을 막걸리'를 한 잔 따랐다.

    "아스파탐 무첨가." 인공적인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았다고 한다. 반신반의하며 한 모금 마셔보니, 혀끝에 감도는 맛이 놀라울 정도로 달달하다. 그것은 설탕이 주는 가벼운 단맛이 아니었다. 쌀과 누룩이 발효되며 스스로 뿜어내는 곡물의 은근하고 묵직한 단맛이었다.

    억지로 꾸미거나 보태지 않아도, 본질에 충실하면 이토록 훌륭한 맛을 낼 수 있다는 것. 오늘 산사원에서 배운 '장인의 고집'과 '몰입의 힘'이 이 술 한 잔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나의 내일도 이 막걸리처럼, 인위적인 억지스러움 없이 본연의 깊이로 승부하는 삶이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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