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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기록 25] 단칸방의 추억: 홀로 서기를 배운 그 좁은 부엌
    추억 기록 2025. 12. 26.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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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빡빡한 삶이 시작되었다."

    '오복 상회'라는 넉넉했던 울타리를 떠나,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오남매가 마주한 현실은 차가웠다. 동네에서 아마도 '큰집'이라 불리던 그곳과의 인연이 다한 것일까. 나름대로 번듯하게 살아가던 우리 가족은, 어느 날 갑자기 단칸방이라는 좁디좁은 현실 속에 던져졌다. 어린 마음에도 그것은 마치 거지처럼 살게 된 것 같은 비참함으로 다가왔다. 큰 누나와 둘째 누나는 밖에서 자취를 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남은 식구들의 삶은 고단하기 그지없었다.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배고픔'이다.

    하루는 배가 너무 고파 현자 누나와 함께 부엌에서 라면을 끓였다. 라면 하나로는 둘의 배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했기에, 아마 국물이라도 실컷 먹으려 했던 모양이다. 물을 한강처럼 가득 붓고 끓이다 보니, 면은 퉁퉁 불어 터지고 국물은 밍밍해져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토록 배가 고팠는데, 눈앞에 있는 유일한 음식을 망쳐버렸을 때의 그 허망함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웃어넘길 수도 있는 에피소드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는 참으로 기가 막히고 서러운 사건이었다.

    밤이 되면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밤 10시만 되면 칼같이 불을 끄게 하셨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 했던 현자 누나와 나는 어둠 속에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조용히 부엌으로 자리를 옮겨 전등을 켰다.

    그 좁고 냄새나는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책을 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주인집에서는 세 들어 사는 우리가 전기를 쓰는 것을 무진장 통제하고 눈치를 주었기 때문이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 주인집의 따가운 눈총과 아버지의 엄명 사이, 그 좁은 틈바구니 속에서도 현자 누나는 묵묵히 공부를 해나갔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그렇게 집중할 수 있었는지, 어린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독기였고 끈기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바로 그 시절에 비로소 '철'이 들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살아계시고 오복 상회에 머물던 시절, 나에게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항상 누군가 내 등 뒤를 지켜주고 있다는 든든함, 내가 넘어져도 받아줄 쿠션이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좁은 단칸방으로 밀려오면서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는 정말로 나밖에 없구나.'

    내 뒤를 지켜주던 따뜻한 배경은 사라졌고, 나는 오롯이 내 힘으로 이 차가운 현실을 버텨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배고픔을 참고,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책을 보던 그 시간들은 단순히 공부를 하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호받던 소년이 홀로 서는 법을 배우는, 아프지만 꼭 필요했던 성장통의 시간이었다.

    그때 그 단칸방에서 느꼈던 고독과 결핍이, 어쩌면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뼈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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