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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기록 7] 눕지 않는 의자, 그리고 누나의 월급봉투추억 기록 2025. 12. 24. 11:05728x90반응형SMALL
"꿈도 꾸지 마라."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대학 캠퍼스의 낭만보다는 공장의 기계 소리가 더 가까운 현실 속에 살고 있었다.
누나는 구로공단에서 밤낮없이 미싱을 돌렸다. 그렇게 한 달을 꼬박 일해 손에 쥐는 월급이 16만 원. 그런데 대학 등록금은 50만 원이었다. 누나의 세 달 치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겨우 한 학기를 다닐 수 있는 돈이다. 그 뻔한 산수를 할 줄 아는 놈이 어떻게 감히 대학을 꿈꾸겠는가. 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 내 인생의 핸들을 강제로 꺾은 것은 담임 선생님이었다. 3학년 진학을 앞둔 어느 날, 선생님이 예고도 없이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가정방문이었다. 선생님은 비좁은 집안을 둘러보시고, 아버지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셨다.
대화를 마치고 나오시는 선생님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집안 형편에서 지원을 바라는 건 무리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체념하신 듯했다. 선생님은 나를 집 밖으로 조용히 불러내셨다.
"너는 공부 안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놈이다."
선생님은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접은 대신, 나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신 것 같았다. 당장 등록금 낼 돈이 없다고 버티는 내게 선생님은 무모하리만치 단호했다.
"일단 합격해. 돈은 그다음에 생각하자. 그리고... 내일부터 학교 나오지 마라. 그 시간에 독서실 가서 죽어라 공부만 해. 출석은 내가 책임진다."
가정방문까지 와서 확인한 암담한 현실 앞에서도, 선생님은 포기 대신 '파격적인 배려'를 선택하셨다. 오직 제자의 가능성 하나만 믿고 학교 규정까지 어겨가며 '인생을 건 도박'을 하신 것이다. 그 믿음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길로 가방을 싸 들고 독서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과 반이었던 나는 인문계 과목의 기초가 전무했다. 영어 단어 하나, 국어 지문 하나가 다 높은 벽이었다. 그때 나를 구원해 준 것은 친구 최인호였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 친구는, 끙끙 앓는 내게 핀잔 대신 얇은 책 한 권을 건넸다.

"두꺼운 책 볼 시간 없어. 대성학원에서 나온 이 얇은 교재, 이것만 다 외워."
기출문제 위주로 정리된 그 얇은 책은 나에게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나는 요령을 피울 줄 몰랐기에, 친구가 일러준 대로 무식하게 파고들었다.
독서실 칸막이 안, 나는 스스로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절대 눕지 않는다."
졸음이 쏟아지면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젖히거나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잤다. 16만 원을 버는 누나가 공장 불빛 아래서 청춘을 바치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계신데... 내가 감히 두 다리 뻗고 바닥에 누워 잘 수는 없었다. 바닥에 등을 대는 순간, 이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현실에 영원히 안주하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엉덩이가 배기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그 고통만이 나를 깨어있게 했다.
그리고 운명의 날. 화려한 수석 합격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보란 듯이 원하던 대학의 합격증을 받아냈다. 얇은 문제집 한 권과 의자 위에서의 쪽잠이 만들어낸, 내 인생 최고의 반전이었다.
등록금은 결국 누나들의 몫이었다. 자신들은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못하면서, 동생의 학비를 위해 기꺼이 헌신해 준 누나들.
대학 졸업식 날, 내 손에 쥐어진 졸업장은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로공단의 먼지 쌓인 16만 원짜리 월급봉투들이 모여 만든 탑이었고, 누나들의 잘려나간 청춘이었다.
나는 그 무거운 사랑을 빚지고서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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