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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기록 6]기름 묻은 작업복과 누님의 눈물
    추억 기록 2025. 12. 24.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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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일요일, 선반 기계 앞에서 떠올린 지난날의 기억

    1. 도살장으로 향하는 마음

    얼마 전 발생한 고객사 품질 불량 건으로 회사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자동차 부품 업계에서 '품질 문제'란 곧 전쟁이다. 불량이 터지면 누군가는 고객사로 달려가 납품한 제품을 전수 검사하고 선별해야 한다. 우리 직원들에게 그 선별 작업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과 다름없는 공포다.

    고객사는 '갑'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고압적인 자세로 우리를 대한다. 그곳에선 인격적인 대우를 기대하기 힘들다. 오죽하면 선별 작업을 가느니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직원이 나오고, 실제로 사직서를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처참하고 힘든 시간이다.

    2. 임원이 선반을 잡던 일요일

    그러던 중, 급하게 부품을 추가 가공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하필이면 일요일이었고, 사태의 심각성을 보여주듯 고객사의 품질 담당자와 자재 임원까지 우리 공장에 들이닥쳤다. 당장 기계를 돌려야 하는데, 숙련공을 부를 새도 없이 상황은 급박했다.

    나는 주저 없이 작업복을 입고 선반 기계 앞에 섰다. "부사장님이 직접 하시게요?" 주변의 직원들도, 고객사 임원들도 놀란 눈치였다. 평소 넥타이를 매고 책상머리에 앉아 결재나 하던 사람으로만 보였을 테니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내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기계를 조작하고, 쇠를 깎아내는 그 감각을.

    손에 기름을 묻히고 기계가 돌아가는 진동을 느끼는 순간, 묘한 기시감과 함께 타임머신을 탄 듯 내 기억은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3. 기름 냄새 절어있던 고교 시절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잉크 냄새보다 기름 냄새가 더 익숙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기계공고를 다녔기 때문이다. 일주일 중 4일은 교실이 아닌 실습장에서 보냈다. 책 대신 쇠뭉치를 잡았고, 펜 대신 공구를 들었다.

    당시 내 작업복은 언제나 기름 투성이었다. 빨래를 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 찌든 기름때와 특유의 쇠 냄새. 어린 마음에 그 냄새가 부끄러울 법도 했지만, 나는 그 작업복이라도 입고 무언가 기술을 배워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진장 고마워했다. 그것이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4. 누님의 빨래, 그리고 뒷바라지

    오늘 문득, 그때 그 시절 내 기름 쩐 작업복을 매일같이 손빨래해주던 누님이 떠오른다. 누님은 훗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네 작업복을 빨면서... 내 동생한테 평생 이 일을 하게 해선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시커먼 기름때가 나오는 무거운 작업복을 비벼 빨며 누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 동생이 험한 기계 앞에서 기름을 뒤집어쓰고 일한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나와 어린 여동생, 우리 남매를 책임져야 했던 누나. 그 어깨에 지워진 삶의 무게는 그 젖은 작업복보다 훨씬 더 무거웠으리라.

    5. 에필로그: 감사의 시간

    수십 년이 흘러 나는 자동차 부품 회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오늘 내가 능숙하게 선반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그 시절 기름 밥을 먹으며 익힌 기술 덕분이다.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기름 냄새나는 동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묵묵히 뒷바라지해 준 누님의 희생 덕분일 것이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공장 한가운데서, 나는 잠시 기계를 멈추고 먹먹해진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에 묻은 거뭇한 기름때가 오늘따라 훈장처럼, 그리고 누님의 눈물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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