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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기록 21] 구로공단 쪽방에서 만난 바다, 그리고 누나의 '해저 2만리'추억 기록 2025. 12. 25. 22:08728x90반응형SMALL
아직도 가끔 서점에 들러 '해저 2만리'라는 책 제목을 보면 가슴 한구석이 릿해지곤 한다. 쥘 베른이 그려낸 신비로운 심해의 모험담 때문만은 아니다. 내게 이 책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가난했던 시절 누나들이 건네준 '사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구로공단의 작은 방 한 칸
내가 어렸을 적, 누나들은 서울 구로공단에서 일을 했다. 어느 날 누나들을 보러가서 , 누나들이 지내는 자취방을 찾아간 적이 있다.
공단 어딘가에 자리 잡은 작고 허름한 방. 성인 몇 명이 눕기도 벅찼을 그 좁은 공간이 누나들의 세상이었다. 하루 종일 공장에서 먼지를 마시며 고단하게 일하고 돌아와 잠만 청하던 그곳.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누나들의 생활은 참으로 열악하고 팍팍했다.

가난 속에서 피어난 선물
그런데 그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 누나는 나에게 책 한 권을 사주었다. 그 책이 바로 <해저 2만리>였다.
자신들은 좁은 방에서 웅크리고 자면서도, 동생에게만큼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누나들이 며칠치 밥값을 아껴가며 사주었을 그 책은 내 보물 1호가 되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책장이 닳도록 읽으며 네모 선장의 노틸러스호를 타고 바닷속을 누비는 상상을 했다. 머릿속은 온통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오죽하면 대학 진학을 앞두고 '조선공학과'를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으니까. 내 유년 시절의 꿈은 그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생으로 지켜낸 동생의 꿈
지금 나는 한 기업의 부사장으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그때 누나들의 마음이 보인다.
"일하기 싫으면 밥도 먹지 마라"
아버지가 늘 입버릇처럼 하시던 엄한 말씀 뒤에는, 사실 누나들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4학년 때), 그 빈자리를 채우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던 누나들. 구로공단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동생 기죽지 말라고, 꿈을 꾸라고 건네준 그 책 한 권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힘이었다.
오늘따라 그 시절, 그 좁은 방에서 환하게 웃으며 책을 건네주던 누나들의 얼굴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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