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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기록 16] 그 겨울, 우리를 살린 것은 김치 국물 한 사발이었다
    추억 기록 2025. 12. 2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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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던 어린 시절의 겨울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코끝을 스치는 것은 매캐한 유황 냄새다. 아침마다 골목 어귀에 쌓여 있던 하얀 연탄재, 그리고 저녁 뉴스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던 일가족 연탄가스 중독 사고 소식들. 그것은 그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자, 가난하지만 따뜻하게 겨울을 나려 했던 서민들의 위태로운 일상이었다.

    우리 집 또한 그 위험한 온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우리 남매들은 하마터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뻔했다.

    그날 아침의 기억은 내게 드문드문 끊어진 필름처럼 남아 있다. 새벽녘, 누나들의 방에 스며든 것은 따뜻한 온기가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 일산화탄소였다. 연탄 아궁이 틈새로 새어 나온 가스는 밤새 소리 없이 방 안을 가득 채웠고, 깊은 잠에 빠진 누나들을 서서히 옭아매고 있었다.

    그 위급한 순간, 우리 가족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이웃의 관심이었다. 내 기억 속에는 '염소집 아저씨'라고 불리던 분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평소 우리 가족과 왕래가 잦았던 그분이 아니었다면, 그날 아침의 고요는 영원한 침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봐! 애들 좀 봐! 정신 좀 차려봐!"

    다급한 고함소리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어른들은 축 늘어진 누나들을 마당 평상으로 옮겼다. 당시 연탄가스를 마시면 '동치미 국물'을 마셔야 한다는 속설이 정설처럼 믿어지던 때였다. 누군가 급하게 장독대에서 퍼 온 살얼음 낀 붉은 김치 국물을 누나들의 입으로 흘려넣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그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차갑고 시큼한 그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기적을 일으켰던 것일까, 아니면 이웃들의 간절한 염원이 닿았던 것일까. 누나들은 희미하게 기침을 토해내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다. 염소집 아저씨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김치 국물을 떠먹일 시간조차 없었더라면, 지금 내 곁에 있는 누나들은 추억 속의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구체적인 상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누나들이 모여 앉아 "그때 정말 죽다 살아났지"라며 웃으며 이야기할 때, 나는 그저 끄덕일 뿐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각인된 단 하나의 장면, 다급했던 염소집 아저씨의 목소리와 붉은 김치 국물은 생명의 색깔로 남아 있다.

    불편하고 위험했지만, 이웃이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담장을 넘어 서로를 살려내던 그 시절. 연탄가스의 매캐한 기억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애가 느껴지는 건, 아마도 우리가 그 위험한 겨울을 함께 건너왔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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