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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기록 13] 아버지의 개나리, 그리고 막걸리 대포
    추억 기록 2025. 12. 25.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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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형이 사는 강남의 펜타빌 아파트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높게 솟은 건물, 화려한 조경, 세련된 외관. 사람들은 이곳을 부의 상징이라 부르지만, 나에게 이곳은 여전히 흙냄새 풀풀 날리던 옛날의 '개나리 아파트'로 기억된다.

    아주 오래전, 이 아파트 단지가 막 모습을 갖추어가던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이곳에 정원수를 심는 일을 하셨다. 갓 지어진 아파트 화단에서 인부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나무를 심으시던 아버지의 등 뒤로, 어린 나는 쭈뼛거리며 서 있곤 했다.

    "가서 대포 한 잔 받아 오너라."

    한참 삽질을 하시던 아버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주전자를 들고 근처 막걸리 집으로 달려가는 길은 왠지 모르게 신이 났다. 뽀얀 막걸리가 주전자에 찰랑거리면, 오는 길에 몰래 주전가 주둥이에 입을 대고 살짝 맛을 보기도 했다. 톡 쏘면서도 달큰하게 넘어가는 그 맛. 어린아이에게는 금지된, 하지만 너무나 달콤했던 그 맛은 아버지의 땀방울이 섞인 노동의 맛이었을까.

    그 무렵 나는 장난감 가게 진열장에 놓인 '대포' 장난감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아버지에게 대포를 사달라고 조르면, 아버지는 막걸리 잔을 기울이시며 짓궂게 웃으셨다.

    "이 녀석아, 막걸리 대포를 사달라는 거냐?"

    아버지의 그 핀잔 섞인 농담이 어린 마음에는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고된 노동 끝에 아들과 나누던 아버지 나름의 유희였으리라.

    세월이 흘러 개나리 아파트는 펜타빌이라는 이름으로 변했고, 아버지가 심었던 그 어린 묘목들은 이제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아파트 숲을 지키고 있다. 처형네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울창한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저 나무의 뿌리 깊은 곳에는 아버지의 땀과, 내가 몰래 훔쳐 마시던 막걸리의 달콤함, 그리고 '대포'를 사이에 둔 우리 부자의 실없는 농담이 스며들어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땀 흘려 심은 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는 내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어 서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아들과 딸은 훗날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내가 아이들을 위해 심고 있는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내가 건네는 농담이나 함께한 시간들이 아이들에게도 달콤하고 애틋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오늘따라 유난히 그 시절, 아버지의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그 투박했던 '대포' 사랑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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