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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기록 3] "조선에 둘도 없는 아들"이라 부르시던 어머니, 그리고 나의 '부모'였던 누나들추억 기록 2025. 12. 23. 20:48728x90반응형SMALL
"세웅이는 조선에 둘도 없는 아들이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저를 앉혀두고 늘 이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습니다. 저를 향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담긴 그 목소리는 어린 제 세상의 전부이자 가장 든든한 방패였습니다.
하지만 국민학교 4학년, 어머니가 떠나시자 저의 세상도 멈췄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와 이어진 집안의 풍파 속에서 저는 어린 나이에 홀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야만 했습니다. 온 세상을 잃은 듯 막막했던 그때, 저의 손을 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저의 누나들이었습니다.

나의 삶을 지탱해준 세 개의 기둥
어머니가 안 계신 빈자리에서 저의 '진짜 부모님'은 세 분의 누나와 매형들이었습니다.
- 자신의 꿈을 접고 동생의 길을 열어준 셋째 누나: 전교생 2,000명 중 1~2등을 다투던 수재였던 누나는 저를 공부시키기 위해 자신의 빛나던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누나가 흘린 땀방울이 오늘날 저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온갖 정성으로 보살펴준 둘째 누나: 어머니 없는 집안에서 동생이 기죽지 않도록 온 마음을 다해 저를 돌봐주었습니다. 누나의 따뜻한 손길은 제 유년 시절의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 가정을 꾸려 안정을 찾아준 큰누나: 큰누나는 저를 결혼시켜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누나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도 외로이 홀로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누나들과 매형들은 저에게 단순히 형제자매가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저는 비로소 번듯한 어른이 되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슴 한구석에 남은 아픈 이름, 여동생 현미
하지만 누나들에게 받은 그 큰 사랑을 생각하면, 하나뿐인 여동생 현미에게는 늘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당시 저 역시 삶이 버거워 동생을 세심하게 챙기지 못했고, 결국 동생은 먼 미국 땅으로 떠나야만 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동생을 내 곁에서 케어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요즘 들어 부쩍 미국에 있는 여동생 생각이 많이 납니다. "미안해, 현미야... 오빠가 그때는 너무 부족했구나."
누나들이 지켜준 삶, 이제는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옛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참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저보다 더 힘들었을 누나들의 고통과 타지에서 외로웠을 여동생의 마음이 가슴을 아프게 찌릅니다.
지금 저는 자동차 부품 회사의 부사장으로, 또 방송통신대학교의 학생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제 스스로는 보잘것없다 느껴질 때도 있지만, 누나들이 지켜낸 이 삶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 합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누나들이 닦아준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이제는 그 미안함을 사랑으로 갚으며 살아가겠습니다.
누나들, 매형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현미야, 오빠가 많이 미안하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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