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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기록 2] 17세, 선정릉의 가랑비와 목덜미에 내려앉은 기억
    추억 기록 2025. 12. 2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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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계공고, 그리고 '벨아미'의 청춘들

    고등학교 1학년, 그 시절 나는 기계공고의 학생이었다. 우리 학교에는 특별한 써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기능대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이름은 '벨아미(Belle Ami)'. 이름만큼이나 끈끈했던 그 써클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기술을 연마하며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특별했다. 투박한 기계 소리가 가득하던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인근 여고 학생들과의 설레는 '미팅'이 약속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2. 가랑비 내리던 선정릉의 오후

    우리가 만남의 장소로 정한 곳은 서울의 선정릉이었다. 도심 속 고요한 왕릉은 소년들의 설렘을 감싸 안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하늘에선 운명의 장난처럼 가느다란 가랑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우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무덤 앞 제사를 지내는 건물(정자각)의 처마 밑으로 모여들었다. 친구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성스레 싸 온 간식거리를 확인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 광경이 궁금해, 앉아 있는 친구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들의 활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3. 목덜미를 스친 서늘한 운명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툭, 하고 묵직하고 서늘한 감촉이 내 목덜미를 덮쳤다.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그것은 거대한 구렁이였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처마 위에 잠복하고 있던 구렁이가 아마도 새를 잡아먹던 중 중심을 잃고 내 목 위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내 교복 어깨와 가슴팍에는 구렁이가 사투를 벌이며 흘렸을 핏자국이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너무나 놀라 숨이 멎을 것 같았던 그 찰나, 구렁이는 바닥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가 기어갔다.

    더욱 기이했던 것은 그 후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한 분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커다란 구렁이를 휙 집어 들고는 사라졌다. 그 짧고도 강렬했던 사건은 가랑비 섞인 공기와 함께 내 기억 속에 깊이 박혔다.

    4. 다시 깨어난 17세의 기억

    오랜 세월이 흘러 어느덧 사회의 중책을 맡은 지금, 잊고 지냈던 그날의 편린을 다시 꺼내 준 것은 다름 아닌 옛 동창들이었다.

    "그때 기억나? 너 목에 구렁이 떨어진 거!"

    친구들의 입을 통해 다시 소환된 그 이야기는 단순히 '놀라운 사건'을 넘어, 우리가 가장 뜨겁고 순수했던 시절의 증표가 되었다. 선정릉의 처마 밑, 가랑비 냄새, 그리고 목덜미의 서늘한 감촉까지. 그 모든 것은 이제 나만의 특별하고도 소중한 인생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모처럼 이 일로 생각이 나서 문자로 안부인사라도 했다.

    5. 성공의 서사, 그리고 그날의 징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훗날 역사에 남을 만큼 크게 성공한 인물로 기록되었다면, 선정릉에서의 이 사건은 어떻게 회자될까?

    왕의 기운이 서린 능에서, 그것도 가랑비 내리는 정자각 아래에서 하늘로부터 거대한 영물이 내려온 사건. 예로부터 구렁이는 업신(業神)이나 재물을 상징하기도 했으니, 당시의 그 아찔한 경험은 평범한 소년이었던 나에게 다가온 '특별한 운명의 서막'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릿한 피가 묻은 교복을 입고도 미팅을 이어갔던 그 대범함은, 어쩌면 훗날 비즈니스 현장에서 맞닥뜨릴 수많은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강인한 담력의 예고편이었을 것이다.

    친구들의 웃음 섞인 회고 속에 담긴 그날의 구렁이는, 이제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내 인생의 범상치 않았던 출발을 알리는 하나의 전설처럼 가슴 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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