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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현장의 에이스가 내게 저주를 퍼부을 때 (직장인의 위기, 그리고 리더의 무게)은퇴를 준비합니다. 2025. 12. 20. 09:23728x90반응형SMALL
제조업에서 '현장'은 뿌리와도 같다. 나는 현장의 경험을 책상물림의 지식보다 높게 산다. 그래서 현장에서 업무 센스가 있고 스마트한 직원을 눈여겨보았다가 사무실 핵심 인원으로 발탁하는 시도를 자주 한다. 기계를 돌려본 사람만이 아는 디테일이 사무실의 기획력과 만났을 때 터지는 시너지를 믿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동안 이 시도는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1. 현장의 베테랑, 사무실의 미운 오리 새끼가 되다
야심 차게 사무직으로 보직 변경을 한 그 직원은, 안타깝게도 사무실이라는 생태계에 적응하지 못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태도의 문제였다. 그는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밥을 먹었고, 협업해야 할 타이밍에 입을 닫았다. 무엇보다 사무직의 기본인 '엑셀'조차 배우려 하지 않았다. 고난도의 함수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나는 현장 사람이라 모른다"는 방어막 뒤에 숨어버렸다.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인정받는 '선수'였던 그가, 사무실에서는 서툰 '초보'가 되는 상황. 그 자존심의 상처를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고립을 자초한 그를 보며 나는 결국 인사 조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2. 돌아온 것은 반성이 아니라 '저주'였다
인사 발령이 나자, 내 핸드폰으로 장문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 가족까지 들먹이는 저주, 나를 '할 일 없는 꼰대'라 비하하는 내용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순간, 나 역시 인간인지라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내가 쏟았던 설득의 시간과 배려가 짓밟힌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정리해 온 '직장인의 5대 위기' 중 가장 고통스럽다는 '인간관계의 위기(적의와 혐오)'였다. 믿었던 직원에게서 살의에 가까운 적대감을 마주하는 순간, 리더는 깊은 회의감에 빠진다.
3. 그가 느꼈을 '효용 가치의 위기'를 이해하다
하지만 분노를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가 왜 그토록 악에 받친 문자를 보냈을까. 그는 직장인이 겪는 가장 큰 공포인 **'효용 가치의 위기'**를 겪고 있었을 것이다. 익숙한 현장을 떠나 낯선 사무실에 왔는데, 자신의 무기(경험)는 통하지 않고 새로운 무기(엑셀, 사무 능력)는 손에 익지 않는다.
자신의 쓸모가 사라졌다는 공포, 조직에서 밀려난다는 두려움. 그 막막함이 나를 향한 공격적인 분노로 표출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짐승이 울부짖듯, 그 또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4. 나 또한 해고당해 본 사람이기에
나는 그 문자에 답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법적 조치나 맞대응 대신, 그저 침묵하며 그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나 또한 과거 어느 조직에서 해고를 당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출근할 곳이 사라진 아침의 공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나를 내친 조직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그 처절한 심정을 기억한다. 그때 나도 누군가를 향해 소리 지르고 싶었으니까.
사람을 쓰고, 평가하고, 때로는 내보내야 하는 자리는 외롭다. 욕을 먹는 것 또한 이 자리에 앉은 사람의 연봉에 포함된 '책임'일 것이다.
비록 이번 인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내게 상처를 남겼지만,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화가 가라앉은 그가 훗날 어디서든 제 몫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나는 또다시 현장의 흙 묻은 진주를 찾아 사무실로 데려올 것이다.
제조업은, 그리고 회사는 결국 사람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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