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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억 기록 12] 아버지의 짚 덮개, 그 무거운 삶의 무게에 대하여
    추억 기록 2025. 12. 25.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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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아버지는 그동안 평생을 바쳐 운영하시던 '오복상회'와 국수공장을 모두 접으셔야 했다. 아마도 사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깊으셨던 것 같다.

    어렵게 다시 자리를 잡은 곳은 방배동의 작은 비닐하우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남 비행장 끝자락(주소지는 고등동이었다)에 비닐하우스 두세 동을 짓고 본격적으로 화훼업을 시작하셨다. 흙을 만지며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역시, 자연은 거짓말을 안 하는구나."

    국수공장과 상회를 하시며 사람에게 데이고 베인 마음을, 묵묵히 자라나는 식물들을 보며 치유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아버지의 농장은 주로 제주도 같은 남쪽 나라에서 어느 정도 자란 열대 관엽수를 가져와, 서울의 혹독한 기후에 적응시켜 파는 식이었다. 제주도에서 막 올라온 나무들의 뿌리에는 현무암 지대의 거무튀튀한 흙이 묻어 있었다. 그 흙을 볼 때면 나무들이 겪어야 할 매서운 겨울이 걱정되곤 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순화'였다. 따뜻한 곳에서 자란 나무들이 서울의 칼바람을 견디게 하려면, 밤에는 따뜻하게 덮어주고 낮에는 걷어주는 정성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자동화 시설이 없었기에, 우리는 짚으로 엮은 두꺼운 덮개를 사용했다.

    그 짚 덮개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해가 지면 그 무거운 덮개를 하우스 지붕 위로 덮고, 해가 뜨면 다시 걷어내는 일은 고된 중노동이었다. 나도 학교를 다녀오면 자주 그 일을 도왔지만, 솔직히 말하면 할 때마다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고, 고단함에 못 이겨 그만 비닐하우스 덮개를 덮지 않고 잠드시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비닐하우스의 풍경은 참혹했다. 애지중지 키우던 꽃나무들이 간밤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모두 얼어 죽고 만 것이다. 거무튀튀한 흙을 품고 올라온 그 생명들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보았다. 항상 강하고 무뚝뚝해 보이던 아버지가, 얼어버린 나무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하루 종일 오열하셨다. 그 눈물은 단순히 돈을 잃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일어서려던 희망,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순간의 실수에 대한 자책이 뒤섞인 통곡이었으리라.

    그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라도 챙겼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써서 덮개를 덮어드렸다면...'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어깨에 지워진 '삶의 무게'를 실감했다. 내가 그토록 무거워하며 걷어내고 싶어 했던 그 짚 덮개의 무게가, 사실은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매일매일 감당해야 했던 가장의 무게였다는 것을.

    지금도 살다가 힘든 순간이 오면, 가끔 성남 비행장 끝자락 그 비닐하우스에서 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는 아버지가 밉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었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버지는 그 모진 세월 속에서 참으로 치열하게, 그리고 힘들게 우리를 지켜오셨다는 것을.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면, 문득 그날의 짚 덮개 냄새와 아버지의 젖은 뒷모습이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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