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배동 논두렁에서 벙커까지... 내가 40년째 새벽 6시에 출근하는 이유
저녁 술자리 대신 새벽 공부를 택한 '셔터맨'의 고백
1. 방배동 논두렁을 뛰던 소년
지금은 빌딩 숲이 된 서울 방배동. 하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방배역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매일 새벽 5시. 어김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일어나라! 뛰러 가자." 아버지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버지는 누나 셋과 나를 깨워 집 앞 논두렁을 뛰게 하셨다. 마치 군대 구보 같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던 그 새벽의 차가운 공기. 그것이 내 몸에 새겨진 첫 번째 '새벽의 기억'이었다.

2. 눅눅한 벙커의 호랑이 과장님
군대에 가서도 새벽과의 인연은 끊기지 않았다. 전방 부대 행정반, 사무실은 산속 벙커에 있었다. 습기가 차 눅눅하고 어두운 그곳. 당시 모시던 과장님은 호랑이 같은 분이었다. 그분은 늘 새벽같이 출근하셨고, 나는 그분의 헛기침 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긴장 속에 시작되던 조회. 아버지의 논두렁 훈련과 군대의 벙커 생활이 합쳐지니, 어느새 '새벽 기상'은 내 DNA가 되어버렸다.
3. "회사의 셔터는 내가 올린다"
전역 후 회사에 입사해서 나는 나만의 원칙을 세웠다. "가장 먼저 문을 여는 사람이 되자." 나는 매일 아침 남들이 잠든 시간에 사무실 불을 켰다. 그때 내 별명은 '셔터맨'이었다. 문을 열고, 또 제일 늦게 문을 닫고 퇴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원이 된 지금, 나의 원칙은 조금 수정되었다. "문은 내가 열되, 퇴근은 5~6시에 칼같이 한다." 임원이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직원들이 눈치 보느라 퇴근을 못 한다.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면, 새벽에 일찍 나오고 저녁엔 쿨하게 사라져 주는 게 미덕이다.
4. 왜 하필 새벽인가? (저녁형 인간 vs 새벽형 인간)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일찍 나오면 피곤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직장인이 무언가를 성취하려면 무조건 새벽이어야 한다.
저녁 시간? 직장인의 저녁은 '내 시간'이 아니다. 회식, 친구와의 약속, 갑작스러운 야근... 변수가 너무 많다. 루틴(Routine)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새벽은 배신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전화벨도 울리지 않는다.
5. 30년 새벽 공부의 결과
이 고요한 새벽 시간에 나는 수많은 '딴짓'을 했다.
- 남들 잘 때 대학원(MBA) 공부를 했고,
- 현장에 필요한 품질경영기사, 산업안전기사 자격증을 땄고,
- 뒤늦게 편입한 방송대 영문과 과제를 했고,
- 지금은 파이썬 코딩을 하고, 이렇게 블로그를 쓴다.
이 모든 성취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그저 남들이 이불 속에 있을 때, 먼저 나와서 책을 폈기 때문이다.
6. 은퇴 후에도 나는 뛸 것이다
이제 은퇴를 하고 부산 집으로 내려가면, 직함은 없어지겠지만, 나의 새벽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시 새벽 예배에 나가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것이다.
방배동 논두렁을 뛰던 그 꼬맹이가 60대 임원이 될 때까지, 나를 키운 건 8할이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