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기록 45] 1985년, 강원도의 산과 변치 않는 전우들
1. 뜨거운 시작, 그리고 산으로 향하다
1985년, 소위 임관과 함께 내가 향한 곳은 전라도 광주였다. 초급 장교를 훈련시키는 포병학교에서의 4개월은 그 해의 여름만큼이나 뜨거웠다. 그 맹렬했던 훈련을 마치자마자 떨어진 배치지는 강원도 최전방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산뿐인 곳.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그곳에 우리 동기 7명이 모였다. 갓 임관하여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이 이글거리던, 눈빛이 살아있는 친구들이었다.
2. 부조리한 현실과 고난의 연속
패기와 열정으로 시작했지만, 자대 생활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바로 윗 기수 선배들의 소위 '군기 잡기'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야, 1,000원 줄 테니 가서 맥주랑 안주 사 오고, 거스름돈 5,000원 남겨와라."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심부름을 시키거나, 전투화에 맥주를 콸콸 따라 마시게 하는 등 그야말로 갈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부당한 대우 앞에서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친구는 없었다. 그저 묵묵히 견뎌낼 뿐이었다.
괴로움은 선배들뿐만이 아니었다. 대대장까지 가세해 CP(지휘소) 앞으로 집합시키고 훈시하기 일쑤였으니, 배치 후 몇 달간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3. 교육장교의 무게와 100만 원의 빚
시간이 흘러 각자 보직을 받으며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듯했다. 내가 받은 보직은 '교육장교'였다. 이름은 그럴싸했지만, 실상은 보병부대의 모든 훈련을 따라다녀야 하는 고된 자리였다. 다리가 쉴 날이 없었다. 훈련장에서 돌아오면 기다리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업무 서류들이었다.
업무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전임자 유 모 중위가 남기고 간 유산이었다. 그가 내게 남긴 것은 인수인계서가 아니라 100만 원이 넘는 빚이었다. 당시 내 월급에서 재형저축을 떼고 통장에 찍히는 돈은 고작 7만 원. 그 돈으로 어떻게 그 큰 빚을 감당하란 말인가. 현실은 가혹했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4. 당직실을 지키던 밤들
동기들 대부분은 포대로 배치받거나 관측소(OP)로 올라가 버렸다. 대대에 남아 있는 동기라고는 측지장교와 육사 장교인 권 중위, 그리고 나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직 근무는 거의 우리 셋이 도맡아 했다. 2~3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당직 근무. 밤을 꼬박 새우고도 다음날 휴식은 없었다. 피로가 누적된 눈을 비비며 또다시 훈련장으로, 업무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5. 40년 후, 시간만 흘렀을 뿐
그렇게 치열하고 힘들었던 시간도 어느덧 적응이 되어갈 무렵, 내 마음은 서서히 사회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군문을 나선 지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네 번은 변했을 그 시간 끝에 다시 그 동기들을 만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이 다 변했어도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전한 말투, 익숙한 행동거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까지. 그 옛날,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전투화에 술을 받아 마시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던 그 청년들이 그대로 내 앞에 있었다. 변한 것은 오직 희끗해진 머리카락과 주름, 그리고 흘러버린 시간뿐이었다.
오직 한가지.. 세월이 변해도 전우는 변하지 않는구나.. 그 마음은
그들은 여전히 나의,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전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