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기록

[추억 기록 44] 삐그덕대던 3류 계산기의 비애, 그리고 카시오의 추억

파이썬 공장 2026. 1. 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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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낭만보다는 치열함이, 그리고 넉넉함보다는 늘 부족했던 주머니 사정이 먼저 생각납니다. 누구나 다 형편이 어렵던 그 시절, 공대생이었던 저에게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공학용 계산기'입니다.

공대생에게 계산기가 없다는 건, 군인이 총 없이 전장에 나가는 것과 다름없었지요. 복잡한 수식을 풀어내야 하는 우리에게 그건 생존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소중한 계산기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최고의 고가품이었고, 어렵게 장만했던 것이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수업은 들어야 하는데, 다시 살 돈은 없고... 참 막막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구세주처럼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바로 둘째 누나, 숙이 누나였습니다. 사실 그때 누나의 형편도 참 어려웠습니다. 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팍팍한 살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동생이 기죽어 있는 게 안쓰러웠는지, 정말 큰 맘 먹고 그 비싼 계산기를 사주겠다고 나선 것이었죠.

누나의 그 마음이 너무 고맙고 또 죄송해서, 차마 비싼 걸 고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 딴에는 누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겠다며, 유명한 일제 카시오(Casio) 대신 국산 '삼성 계산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애국심 때문도 아니었고, 오로지 '경비 절감'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곧 뼈아픈 후회로 돌아왔습니다. "아뿔싸..."

지금의 삼성은 세계 초일류 기업이지만, 솔직히 그때의 삼성 전자제품, 특히 계산기는 정말 형편없는 '3류 품질'이었습니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손끝에 전해지던 그 삐그덕거리는 느낌, 심지어 가끔 계산 결과도 틀리게 나오는 황당함까지.

그 삐그덕대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밤새 과제를 하고 시험을 칠 때마다 속이 얼마나 터지던지요. 잃어버린 카시오 계산기가 사무치게 그리웠지만 어쩌겠습니까. 누나가 큰 맘 먹고 사준 그 계산기를 붙들고 억척스럽게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일본 도요타 자동차로 연수를 보내주었을 때, 제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한 건 자동차 공장 견학보다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일본의 한 전자상가 마트. 그곳 진열대에서 반짝이는 '카시오 계산기'를 다시 마주했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 시절, 돈 몇 푼 아껴보겠다고 엉터리 계산기와 씨름하며 삼켰던 설움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망설임 없이 카시오 계산기를 사 들고 나오던 그 순간, 그제야 비로소 가난했던 공대생 시절의 한(恨)을 푼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계산이 되는 세상이지만, 가끔은 그 시절 투박했던 버튼의 감촉이 그립습니다. 물론, 삐그덕대던 그 삼성 계산기 말고, 도요타 연수 때 샀던 그 매끈한 녀석으로 말입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참 부족한 것으로도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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