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기록

[추억 기록 23] 어머니의 마지막 봄을 기억하며

파이썬 공장 2025. 12. 26.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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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시간: 국민학교 4학년, 봄방학 직전 어느 오후 4시 장소: 집, 그리고 용미리

1. 그날 오후의 붉은 얼굴과 희망

나의 기억 속 어머니의 마지막 장면은 병실이 아닌, 집으로 돌아오시던 그날 오후 4시의 풍경이다. 용인 외가 친척 잔치에 다녀오시던 길, 어머니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술을 한 잔 드셨던 걸까, 아니면 봄바람에 마음이 들뜨셨던 걸까.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으시던 분이기에 그 붉은 기운은 더욱 낯설고도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다.

그날 어머니는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건넨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제 우리 집이 좋아질 거야. 앞으로 다 잘 될 거야."

그 말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그 순간, 다가올 미래의 행복을 미리 맛보고 계셨던 것 같다. 비록 그 행복을 육신으로 다 누리지는 못하셨지만, 어머니의 영혼은 그 순간 가장 충만하고 행복한 상태에서 삶의 정점을 찍으셨던 것이 아닐까.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은 당신이 떠난 후 홀로 남을 어린 아들을 위한 축복의 주문이었을 것이다.

2.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지킨 것

갑작스러운 쓰러짐, 그리고 3일 뒤의 이별. 어린 나에게 누군가 물었다. "마지막 모습을 보겠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볼 자신이 없었다. 무서웠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그때 들어가지 않았을까? 엄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머니는 의식이 없는 차가운 병실의 모습으로 아들에게 기억되길 원치 않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다 좋아질 거야"라며 붉게 상기된 얼굴로 환하게 웃던, 그 가장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닐까.

내가 마지막 순간 병실 문을 열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3. 하늘이 무너진 아이, 그리고 홀로 선 시간

어머니를 용미리에 모시고 돌아오던 날, 나는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의 뜻을 뼈저리게 알았다. 세상에 내 편이 사라졌다는 절대적인 고독. 밥을 챙겨주고, 옷을 입혀주고, 무조건적으로 나를 감싸주던 존재의 부재는 어린 소년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참 외로운 거지..."

그 외로움은 뼛속 깊이 사무쳐 나를 성장시켰다. 내 편이 없다는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내가 나 자신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 당신이 떠난 후 세상은 참 차갑고 외로웠지만, 당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제 좋아질 거야"라는 그 말을 등불 삼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용미리의 차가운 바람 속에 계시겠지만, 제 기억 속의 당신은 영원히 그날 오후 4시의 따뜻한 봄볕 속에, 붉게 상기된 희망찬 얼굴로 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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