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기록

[추억 기록 15] 문짝과 바꾼 스케이트, 그리고 '즐거운 고통'

파이썬 공장 2025. 12. 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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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해 겨울, 논두렁 얼음판의 추억

국민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그 시절 겨울이면 동네 주변의 논에 물을 대서 얼음판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았다. 친구들은 그곳에서 썰매를 타거나 스케이트를 지치곤 했다. 쌩쌩 달리는 그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나도 저 무리에 섞여서 바람을 가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2. 묵묵부답인 아버지와 철없는 시위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졸랐다. 한번, 두 번, 계속 졸랐지만 아버지는 반응이 없으셨다. 안 된다는 말씀도, 사주겠다는 약속도 없이 그저 무심하게 넘기셨다. 어린 마음에 오기가 생겼다. 나는 나름의 '시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건너방에 드러누워 발로 문을 쾅쾅 차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3. "우지끈!" 무너진 방문과 동대문행

"사줘! 사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길질에 힘을 실었는데, 그만 사단이 나고 말았다. 내 발길질에 방문이 '우지끈'하며 부서져 버린 것이다. 떼를 쓰던 나조차 너무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데 부서진 문을 보신 아버지는 화를 내는 대신, 말없이 옷을 챙겨 입으시고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다. 우리가 향한 곳은 동대문 운동장 근처 스케이트 가게였다. 그렇게 나는 문짝 하나를 부순 대가로 귀한 스케이트를 얻게 되었다.

4. 벼 그루터기와 즐거운 고통

어렵게 얻은 스케이트이니만큼 정말 열심히 탔다. 스케이트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우는 것이었다. 논에 물을 대 만든 스케이트장이다 보니, 얼음 중간중간에 베고 남은 벼 그루터기가 튀어나와 있기 일쑤였다. 신나게 달리다가 그 벼포기에 날이 걸리면 여지없이 고꾸라졌다. 수도 없이 넘어지고 뒹굴었다. 엉덩이가 얼얼하고 무릎이 까져도, 이상하게 그 고통이 싫지 않았다. 넘어질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기분, 그건 차라리 '즐거운 고통'이었다.

5. 장교의 품격, 그리고 우쭐함

그때 몸으로 배운 기술은 세월이 흘러 엉뚱한 곳에서 빛을 발했다. 군대 장교 시절, 겨울이 되면 부대에서 스케이트 대회가 열리곤 했다. 병사들 중에서 선수를 선발하고 훈련을 시키는데, 지휘관인 내가 시범을 보이며 쓱 미끄러져 나갈 때의 그 기분이란. "오, 좀 타시는데요?" 하는 부하들의 눈빛을 보며 느꼈던 그 소소한 우쭐함. 문짝을 부수고, 논바닥 벼 그루터기에 걸려 수없이 넘어지며 배웠던 그 겨울의 '몸의 기억' 덕분이었다.

6. 맺음말

지금도 겨울 논을 보면 생각난다. 철없던 아들의 발길질에 무너진 방문, 그리고 넘어져도 마냥 즐거웠던 그 시절의 훈훈한 추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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