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기록

[추억 기록 11] 아버지의 외국어: 숨겨진 역사와 반전의 기억

파이썬 공장 2025. 12. 25.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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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학(無學)의 오해와 일본어 수업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외국어와는 거리가 먼 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학력은 초등 교육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평소 과묵하시고 생업에만 종사하시던 아버지였기에, 지적인 영역과는 거리가 있다고 멋대로 단정 짓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종이 한 장을 꺼내시더니 한국의 '애국가'와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나란히 써 내려가셨다. "애국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며 강인한 기상을 노래하지만, 일본 국가는 가사가 이러이러해서 두 나라의 사상적 차이가 여기서 드러나는 거란다."

단순히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니었다. 두 나라의 국가(國歌)를 비교하며 그 안에 담긴 민족성과 사상을 가르치려 하셨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교육의 영향으로 일본어에 능통하신 건 이해가 갔지만, 그 통찰력은 학력과는 무관한 아버지 나름의 깊은 철학이었다.

2. 성남 비행장, 비닐하우스의 이방인들

대학 시절, 아버지는 성남 비행장 근처에서 비닐하우스 화훼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리셨다. (비닐하우스에 얽힌 또 다른 사건은 훗날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그곳은 미군 부대와 가까워 가끔 미군들이 지나가곤 했다.

어느 날, 미군 병사 몇 명이 아이비(Ivy) 꽃을 사러 비닐하우스에 들렀다. 나는 대학생이었음에도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 해 쭈뼛거리고 있었는데,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버지가 그 미군들을 맞이하며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신 것이다. "Hey, how are you doing?"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들과 웃으며 옛날이야기부터 농담까지 주고받으셨고, 대화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미군들도 아버지의 이야기에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

3. 카투사(KATUSA)의 기억

내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의 영어 발음은 어설픈 콩글리시가 아니었다. 억양과 발음이 완전한 미국 원어민의 그것이었다.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셨다고 알았던 아버지가, 대학생인 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하시다니.

미군들이 돌아간 뒤, 나는 홀린 듯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 대체 언제 영어를 그렇게 배우셨어요?"

아버지는 덤덤하게, 하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대답하셨다. "나 옛날에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했었어."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아버지는 책상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미군들과 부대끼며 영어를 몸으로 습득하신 것이었다.

4. 아버지의 유전자와 나의 영어

방송통신대 영어영문학과 졸업을 앞둔 지금, 나는 여전히 영어 실력이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아 답답함을 느낀다. 아버지는 교육 없이도 그토록 훌륭한 '실전 영어'를 구사하셨는데, 나는 전공자이면서도 말 한마디 떼기가 어렵다.

"아, 나는 아버지의 그 언어적 유전자를 물려받지 못한 걸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만, 되돌아보면 아버지는 단순히 언어를 잘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일본어로 역사를 가르치고, 영어로 이방인과 웃음을 나누던 아버지. 그날 비닐하우스에서 보았던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은 내 영어 공부의 지향점이자,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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