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기록 10] 논두렁을 달리던 새벽,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
최근 누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우리 남매들에게 강력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지독한 '새벽형 인간'이라는 점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움직이는 이 부지런함. 도대체 이 습관은 어디서 왔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수십 년 전 코끝이 찡하게 시리던 그 시절의 겨울 아침에 그 답이 있었다.

1. 새벽, 논두렁, 그리고 아버지
어린 시절, 우리 집 앞에는 커다란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는 그 논들을 우리의 훈련장으로 삼으셨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아버지는 어김없이 우리 남매들을 깨우셨다.
"일어나라, 뛸 시간이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오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던 그 나이. 겨울바람은 어찌나 매섭던지, 논두렁을 뛰다 보면 손발이 꽁꽁 얼고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발을 떼던 그 시절, 나는 속으로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모른다. 그때는 그저 아버지의 엄격함이 야속하기만 했다.
2. 뒤늦게 밝혀진 '큰 누나의 특혜'
그런데 최근, 이 고생담 속에 숨겨진 재미있는 비밀 하나가 드러났다. 그 옛날, 묵묵히 함께 뛰는 줄로만 알았던 큰 누나에게 아버지의 은밀한 '특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때 아버지가 나만 살짝 옆으로 빠지게 해 주셨어."
큰 누나의 고백에 우리 남매들은 박장대소했다. 동생들이 헉헉거리며 논두렁을 돌 때, 아버지는 맏이였던 큰 누나에게만 슬쩍 쉴 틈을 주셨던 것이다. 아마도 맏딸에 대한 아버지 나름의 애틋함이었거나, 둘만이 공유했던 작은 비밀이었으리라.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그 귀여운 반칙(?)이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3. 몸에 새겨진 부지런함
그토록 싫었던 새벽 달리기였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은 우리 남매들의 몸과 마음에 '부지런함'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습관을 새겨주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준비하고, 맡은 일에 성실히 임하는 지금의 태도. 그것은 책상 위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땅을 딛던 그 시간들이 만들어준 결과물이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주고 싶으셨던 것은, 어쩌면 튼튼한 체력 그 이상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을 대하는 태도, 하루를 맞이하는 자세 같은 것들 말이다.
오늘도 나는 새벽에 눈을 뜬다. 그리고 그 옛날 논두렁을 뛰던 소년처럼, 부지런히 오늘이라는 트랙 위를 달릴 준비를 한다. 춥고 힘들었지만, 결국은 나를 만든 그 시간들에 감사하며.
[에필로그] 새벽 4시의 진실공방
이 글을 올리고 나서 누나들에게 긴급 제보가 들어왔다. 나의 기억 속에 '새벽 동틀 무렵'으로 저장되어 있던 그 시간이, 누나들의 기억 속에는 무려 '새벽 4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야, 그때 우리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뛰었어!"
새벽 4시라니. 한여름이라면 모를까, 깜깜한 겨울 새벽 4시에 그 논두렁을 뛰었다고? 지금의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아마도 해가 뜰 무렵인 5시 반이나 6시쯤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어쩌면 누나들에게는 그 시간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체감상 칠흑 같은 한밤중인 새벽 4시처럼 느껴졌던 건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독하셨던 걸까?
똑같은 시간을 달렸는데도 서로 다르게 기록된 시간. 사람마다 머릿속에 저장되는 기억의 색깔은 참 다른가 보다. 진실이 4시든 6시든, 우리 남매들이 그 시간에 헉헉대며 달렸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