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기록

[추억 기록 9] 오복상회와 아버지의 두 가지 가훈: 기억의 재구성

파이썬 공장 2025. 12. 24.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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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내 기억 속의 우리 집은 단순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그곳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고,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작은 공장이었으며, 온 가족의 땀방울이 배어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닦고 닦으면 빛이 난다."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던 것은 마루 위 커다란 흰 판에 아버지가 친필로 써 붙이신 가훈이었다. 그 투박하지만 힘 있는 글귀는 어린 내 마음에도 깊이 박혔다. 마루 한 켠에는 국수를 말리기 위한 가느다란 대나무 살이 한 통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대나무는 국수를 널 때는 도구가 되었지만, 내가 말썽을 피울 때면 어김없이 아버지의 엄한 회초리가 되곤 했다.

마당 감나무 뒤편 건너방은 누나들의 공간이었고, 집 안 곳곳은 아버지의 사업장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늘 국수를 만드셨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하얀 밀가루 냄새가 집안을 채웠다.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면 바닥에 떨어진 국수 가락을 줍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어린 마음에 그 일이 얼마나 하기 싫었던지, 입을 삐죽거리며 국수를 줍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오복상회'로 통했다. 이름 그대로 오복(五福)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가게는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었다. 요즘의 편의점 같은 구멍가게부터 쌀가게, 연탄 가게, 신문 지국까지 겸했으니 오복상회 문턱은 늘 사람들로 닳아 있었다. 한쪽에서는 동네 누나들이 모여 장갑을 만드는 기계가 돌아갔다. 사람 드나드는 소리, 기계 소리, 일하는 소리로 오복상회는 늘 시끌벅적했고 치열한 활기가 넘쳤다.

풍요와 결핍이 묘하게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쌀값이 오른다는 소문이 돌면 누나들 방에 쌀가마니를 잔뜩 쌓아두었고, 우리는 그 쌀가마니 위에서 잠을 자고 생활했다. 틈만 나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연탄 배달을 거들고 심부름을 다녔다. 가훈이 걸린 안방 한 켠에서 잠을 자다 오줌이라도 싸는 날이면, '키'를 머리에 쓰고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러 가야 했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골목길의 풍경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까. 내 키보다 큰 짐자전거에 젖은 국수를 싣고 남태령까지 배달을 가던 길이었다. 무거운 자전거를 이기지 못해 그만 어느 집 축대를 들이받고 말았다. 이마가 찢어지는 사고였다.

지금도 내 이마에는 그때의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거울을 보며 그 상처를 마주할 때면,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가족 모두가 한 몸처럼 움직였던 시절, 고단했지만 어머니의 온기가 집안을 감싸고 있었던 그 시절.

"닦고 닦으면 빛이 난다."

아버지의 그 가훈처럼, 우리는 오복상회라는 이름 아래 그 시절을 온몸으로 닦아내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마의 흉터는 어쩌면 그 치열했던 시간을 견뎌낸, 나만의 작은 훈장일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 기억의 반전]

그런데 이 글을 쓰며 옛 추억을 나누던 중, 누나들이 내 기억에 제동을 걸어왔다.

"얘, 가훈이 '닦고 닦으면 빛이 난다'라니? 무슨 소리야?" "내 기억엔 분명히 마루 위에 그렇게 써 있었는데?" "아니야, 아버지가 입에 달고 사셨던 진짜 가훈은 **'일하기 싫으면 밥도 먹지 마라'**였어!"

누나들의 주장은 확고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 기억이 더 정확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정말 그 말씀을 주문처럼 하셨다. 비록 교회에는 다니지 않으셨지만, 성경 데살로니가후서에 나오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구절을 어디선가 보시고는 "맞아, 바로 저거야!" 하며 무릎을 치셨던 기억이 난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생각해보면, 마루 위에 걸린 글씨(닦고 닦으면 빛이 난다)는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이었고, 귓가에 맴도는 저 말씀(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은 누나들의 가슴에 박힌 현실이었나 보다.

'부지런히 닦아야' 했던 것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했던 것도 결국은 하나였다. 그게 우리 집, 오복상회를 지탱하던 아버지의 치열한 생존 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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